<물 위로 오라>
JS매거진 편 집 부
영화 ‘오두막(The Shack, 2017년)’에서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인물과 아버지 역할의 맥이라는 주인공이 함께 호수 위를 걷는 장면이 나온다. 물에 빠지지 않고 수면이 단단한 바닥처럼 되어서 걷고 뛰기까지 하는데 이는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마태복음 14:28-29)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이 부분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으나 일단 영화에서도 그렇듯이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영화에서의 상황은 딸을 잃은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영적인 체험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그려지기는 한다.
(이미지 출처:Pixabay이미지)
(1) 정말 물 위를 걸었다고 믿는 이들
일반적인 기성 교회의 설교 내용을 참조해보면 실제로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고 가르친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에 스스로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이 기적은 전적으로 주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대한예수교장로회 시냇가교회, 정지훈 목사, '마태복음 14장 26-30절(물에 빠진 이유)', 2021-01-12)."
오직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니 인간인 베드로도 기적을 행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는 기적을 행하실 때 베드로가 자기도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 요청이 받아들여졌고 그 결과 베드로도 물 위를 걷게 된다. 위급하거나 절박한 나머지 꼭 물 위를 걸어야 하는 그런 상황도 아니다. 그대로 배 안에 있으면 안전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거의 호기심에 가까운 이 요청을 받아주시고는 물 위를 걷게 하셨다(은혜의정원교회, '정재우 목사의 블로그 living life 마태복음 14:28-29')."
두 인용문 모두 공통적으로 물 위로 걸은 사건을 ‘기적’으로 인식한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한 것이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니 이러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반복한다.
(이미지 출처:Pixabay이미지)
(2) 세상의 바다
그런데 예수님의 인도로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왜 바다에 빠졌을까.
(마태복음 14:30-33)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바람을 보고 무서워 바다에 빠져 가는지라’ 하였다. 바람을 보기 전과 후에 어떤 차이점이 있었던 것일까. 먼저 바다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마태복음 13:47-49)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여기서 좋은 물고기와 못된 것이 의인과 악인을 의미하였듯이 물고기는 사람을 뜻하고 바다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말한다. 결국 ‘세상의 바다’라는 표현은 단지 문학 속에서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을 바라볼 때도 그렇게 봐야 한다.
(이미지 출처:Pixabay이미지)
(3) 베드로가 경험한 바다
(마태복음 17: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베드로는 어부였다. 예수님은 그가 이해하기 쉬운 비유로 설명하셨다. 실제로 베드로가 물고기를 낚시로 잡아서 예수님과 자신을 위해 성전세를 낸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바다에 나가 말씀을 전하여 사람들이 듣고 감동을 받아 헌금 한 것을 물고기 입에서 돈 한 세겔을 꺼냈다고 표현하셨다. 그러므로 바다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 세상이고 풍랑은 그 속에서 겪게 되는 인간관계로 인한 오해와 악한 말들로 인한 환란이다.
(4) 물 위를 걸은 예수님과 베드로
물론 예수님의 권능을 강조하기 위해 기적으로 인정하고 가르칠 수도 있다. 하지만 결론은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주장에 머물고 만다. 모든 기성의 설교는 예수님이 전능자이시니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성경에 나온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 같은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할까. 인간과 구별되는 전능하신 신이니 어떤 기적이든 다 행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시인하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롬 10:9)고 했으니 그저 구원 받기 위해서 반복해서 입으로 말하고 듣고 받아들이는 것인가.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사건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다른 곳에 있다.
“이것을 영적인 말씀으로 풀면 예수님과 제자 사이가 항상 이렇게 떨어지면 시험에 든다는 것입니다. 물위로 걸어갔다는 것은 세상을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물위로도 걸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의 입장에서는 세상을 다스리셨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못 가는 물위로 걸어가니 거기서 놀라고 착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귀신이나 물위에 걸어가는 것이지 어떻게 물위로 걸어 갈 수 있느냐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정명석 목사, ‘1999년 3월 7일 주일예배’).”
예수님과 떨어지면 시험에 들고 함께 하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성경을 비유로 볼 때 그 너머의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이라는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를 말씀으로 다스리시며 실천하시는 모습을 물 위로 걸은 것으로 표현된 것을 알면 우리도 예수님을 통해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가 비로소 보이게 된다.
(5) 바라봄의 법칙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었는데 그러한 사람이 왜 바다에 빠지게 되었겠습니까? 빠졌을 때 왜 수영을 하지 않고 살려달라고 몸부림을 쳤겠습니까? 처음에는 베드로도 화평했었으나 '바라봄의 법칙'을 잊어버림으로 이와 같은 화를 당했던 것입니다. 구세주이신 주님만을 바라보지 않고 이 세상의 험난한 파도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세상의 환경에 위축되고 무서워하여 충만했던 화평과 바다위로 걸어가는 기쁨을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어부이면서도 파도를 못 타고 바다에 빠졌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볼진대, (중략) 여러분들도 예수만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의 파도를 쳐다보게 되어 바다에 빠진다면 화평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란에서는 물에 빠진 자를 주님께서만이 건져주실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가장 무섭고 어려운 것은 바로 환란과 핍박입니다. 이런 것이 바다위의 파도임을 깨닫고 결단코 바라봐서는 안되겠습니다(정명석 목사, ‘1984년 8월 5일 주일말씀’).”
전혀 쓸데없는 걱정과 염려를 하다가 마음만 힘들고 잘 되던 일을 오히려 그르친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세상 근심을 모두 맡기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라봄의 법칙’은 세상에 대한 걱정에 빠져 풍랑에 휩쓸리지 말고 주를 바라봄으로 세상 바다를 주관하고 주를 의지하여 그 위로 걷듯 행하라는 의미다.
(마태복음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과 반대로 가면서 잘 안된다고 말하기도 하나 하늘 뜻과 방향을 바라보고 그에 맞추면 모든 염려와 고민이 어렵지 않게 해결될 수 있다.
(6) 왜 물 위로 걸었다고 기록했나
“예수님께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내려오셨는데, 제자들은 배 위에 있었고, 예수님이 철벅거리며 걸어오니 ‘귀신이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것을 보고 예수님은 바다 위로 걸어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바다 위로 걸어다닐 수가 없습니다. 몽산포에 가보니 물이 한참 들어왔을 때 바다를 걸어가니 바다 위로 걸어 다니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 식입니다. 사람이 너무 신비하게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사람으로서는 바다 위로 못 걷는 것입니다. 일반 바다에서 땅바닥이 닿는 물속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것을 쓸 때는 ‘주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셨다’라고 쓴 것입니다. 나부터도 쓰라고 하면 그렇게 쓸 것입니다. ‘주께서 발이 땅에 닿는 바다 위로 걸어오셨다’고 쓰기보다는 그냥 ‘바다 위로 걸어오셨다’고 쓰는 것입니다. 성경을 쓸 때는 예수님의 인격과 권세를 부각시키면서 썼습니다(정명석 목사, ‘1998년 11월 10일 아침말씀’).”
예수님의 권위를 높여드리되 무리하게 자연법칙까지 무시하면서 부각시키는 것은 오히려 ‘만들어진 신’을 꾸며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신론자들이 말하는 ‘만들어진 신’은 이치에 어긋나는 오직 믿음의 영역에서만 모든 것이 가능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모습이다. 성숙한 신앙인은 오해와 억측으로 자신들이 믿고 싶은 형상대로 ‘만들어낸 신’이 아니라 성경에서 정확하게 묘사한 ‘실존하는’ 창조주와 구원주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7) 진리는 언제나 통한다
“예수님께서 물이 찬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바다 위로 걸어오신 것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배를 바닷가에 대어놓았을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모래가 반반합니다. 배를 댄다고 해서 절벽에 대는 것이 아닙니다. 수십 길 깊은 바다에 대놓은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잔잔한 물가에 배를 대어놓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러 가니까요. 가실 때도 물 밟고 갔을 것입니다. 배는 끝까지 가지 못하니까요. 배가 닿을 만큼 대어놓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것입니다. 올 때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배 댈 때보다 물이 더 들어와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월남에서 근무 서며 보니까 저녁보다 새벽에 물이 많이 들어오더라구요. 그래서 기도하고 새벽에 오실 때 배가 있는 곳으로 절벅거리며 오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를 해야지, 예수님께서 공중에 떠서 오신 것으로 설명하면 안됩니다. 분명히 풀어서 전해야 합니다. 풀어서 전할 때 말씀이 뜨겁고, 가슴에 찡하는 것이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백 번 천 번 설명해도 똑같습니다(정명석 목사, ‘1998년 11월 10일 아침말씀’)."
물론 상식을 뛰어넘는 엄청난 기적과 이적으로 예수님을 찬양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러한 이치적인 설명이 거부감이 들 수 있으나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말씀에 의지하여 세상을 주관하는 삶의 태도이다. 선물 포장이 너무 거창해서 정작 내용물을 가려서는 안된다. 진솔한 예수님의 본 모습을 가리는 증거는 불필요하다.
(마태복음 14:22-23)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예수님이 산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물 위를 걷듯이 바닥 위를 밟아 제자들에게 오셨던 것이다.
“배를 대어놓을 때 보면 언덕에다 대놓는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라는 곳을 내가 환상으로 보면 모래가 많아서 한참까지 걸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 데 배를 대어놓고 나머지는 걸어서 예수님께서 감람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갔다가 내려왔는데 배가 저기에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나 왔다. 배를 끌고 와라’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래밭인데 어떻게 배를 끌고 옵니까? 배가 못 들어오는데요. 끌고 온다면 다시 또 끌고 가야 하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배를 찾아보고서 ‘저기구나’하고서 절벅거리며 가니까 잠자던 제자들이 놀라서 ‘귀신이다’한 것입니다. 그 때 ‘내니 두려워하지 말아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다니시니까 귀신으로 본 것이다. 귀신 외에는 물 위로 걸어다닐 수가 없으니까’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풀면 성경을 평생가도 못 풉니다. 그렇게 성경을 푼다고 예수님이 부각됩니까? 오히려 그랬다가는 의심만 받습니다(정명석 목사, ‘1998년 11월 10일 아침말씀’)."
예수님을 영(귀신)으로 본 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잘못 이해하고 오해하면 안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올바로 알고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8) 예수님을 귀신처럼 보지 말아라
예수님을 유령으로 본 경우가 또 있었다.
(누가복음 24: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누가복음 24:37, 쉬운성경) 제자들은 깜짝 놀라며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Luke 24:37, NIV2011) ... thinking they saw a ghost.
개역개정에는 영으로 표현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영(Spirit)이 아니라 귀신(ghost)로 생각했다.
“예수님께서 낮에는 늘 말씀을 하시고 밤에는 산에 가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바다 위에 혹은 육지에 놔두고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밤새워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조용히 하늘 시간을 갖으시고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새벽에 내려왔습니다. 새벽이 가까이 오니 제자들이 무서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 오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귀신인가 해서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정명석 목사, ‘1999년 3월 7일 주일예배’).”
성경의 진리는 오직 믿음 안에서만 통하는 것으로 국한 시켜서는 안된다. 세상 누구에게나 통하고 이해되며 적용 가능한 법칙이다. 실제로 물 위로 중력을 무시하고 걷는다고만 가르쳐서는 예수님이 귀신인지 구원주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9)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
“바다 위로 걸어간 것도 그렇게 가신 것입니다. 배를 대놨을 때 얕은 바다를 걸어가신 것입니다. 배를 대놓은 곳까지 예수님이 물 밟고 걸어온 거리가 100m일까요? 상식적으로 볼 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멀리에 배를 대놓을 리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20여 미터 된답니다.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부터 절벅거리며 걸어서 가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정확합니다. 땅 밟으면서 절벅이면서 걸어가셨다고 합니다. 얼마나 정확합니까? 예수님께서 풀으셨으니 예수님께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나는 성경을 그렇게 풀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풀어줄 뿐입니다. 한 20미터 정도에서부터 걸어왔답니다. 그리고 몇 미터에서부터 걸어왔는지는 내가 지구상에서 처음으로 물어봤다고 하십니다. 내가 몇 미터에서부터 걸어오셨느냐고 물어보니, 순간 갈릴리 바다에 가서 딱 보시면서 ‘한 20여 미터 된다’하십니다. 물어보니 금방 갔다 오십니다. 내가 물어볼 줄을 아시고 그 얘기 나오니까 벌써 갈릴리 바다에 가서 보시더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정확한 거리는 재어보기 전에는 잘 모릅니다(정명석 목사, ‘1998년 11월 10일 아침말씀’).”
성경을 이치에 맞게 풀어서 이해한다고 하면 오히려 역정을 내고 권위를 떨어뜨린다고 하는 자들이 있으나 진리는 종교라는 영역에서만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 만물의 운행 원리도 진리 안에 포함된다. 성경의 말씀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물리 법칙과 어긋날 이유가 없다. 과학과 종교를 분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영역을 반으로 쪼개어 제한하려는 자들이다.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따로 있는가. ‘과학 법칙 따로, 종교의 진리 따로’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그러한 편협한 사고를 경계하고 올바른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10) 세상 바다 위로 걸으라
하지 않아도 될 근심과 염려 고민에 빠져서 마음이 낙심되고 희망을 잃는 이들이 있다.
“예수님을 믿었으면 그대로 할 것이지 왜 의심하다가 바뀌냐는 것입니다. 의심하면 전진할 것이 전진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죽죽 밀고 나가는 것이 믿음의 영웅들이 걸어가는 길들입니다. 바라봄의 법칙과 믿음의 법칙에서 탈선되니 이상하게도 안됩니다(정명석 목사, ‘1984년 12월 16일 주일 예배’).”
희망을 잃으면 우울함에 빠지고 목표를 잃어 갈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한다. 힘이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주저앉고 만다.
“처음에는 베드로도 화평했었으나 천법인 '바라봄의 법칙'을 잊어버림으로 이와 같은 화를 당했던 것입니다. 구세주이신 주님만을 바라보지 않고 이 세상의 험난한 파도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세상의 환경에 위축되고 무서워하여 충만했던 화평과 바다위로 걸어가는 기쁨을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어부이면서도 파도를 못 타고 바다에 빠졌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볼진대, 그 시대 사도들과 동일하게 갈릴리 바다에 걸어가고 있는 여러분들도 예수만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의 파도를 쳐다보게 되어 바다에 빠진다면 화평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란에서는 물에 빠진 자를 주님께서만이 건져주실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에서 가장 무섭고 어려운 것은 바로 환란과 핍박입니다. 이런 것이 바다위의 파도임을 깨닫고 결단코 바라봐서는 안되겠습니다(정명석 목사, ‘1984년 8월 5일 주일 예배’).”
세상의 파도, 풍파와 환란을 헤쳐 나가는 방법은 오직 주만 바라보며 주가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것이다.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우주를 운행하시는 창조자가 원하시는 흐름을 읽고 그에 따라 가는 것이다. 순풍을 따라 가고 물의 흐름에 역류하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드리면 하나님도 내 일이 잘 되게 도와주신다. 내가 내 고민을 해결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도와서 해결해주시는 것이 훨씬 빠르고 이득이다. 그러니 오직 주를 바라보고 일체된 삶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는 방법으로 가야한다.
"기도하고 시대 말씀 듣고 천 년 혼인 잔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 염려를 주께 맡기고 걱정 근심 말고 자기 할 일만 충성으로 하여라(정명석 목사, '2025년 1월 19일 주일말씀')."
<저작권자 ⓒ 제이에스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