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이 걸어온 그 길(19)-정명석 선생님의 위대한 삶[부활의 근본을 깨닫기까지]

jsmagazine.net | 기사입력 2025/01/26 [20:26]

나만이 걸어온 그 길(19)-정명석 선생님의 위대한 삶[부활의 근본을 깨닫기까지]

jsmagazine.net | 입력 : 2025/01/26 [20:26]

[부활의 근본을 깨닫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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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치는 대둔산 바위 절벽에서

 

장대같이 쏟아지던 소낙비도 그치고, 가을을 지나 눈비가 하염없이 쏟아지는 계절이 왔다. 산새와 들새들도 모두 걱정이지만 내가 제일 걱정이다. 잠깐 기도하고 성경이나 읽으며 답답한 마음을 풀고 내려가면 되는 시간이 아니다. 몇 주일, 몇 달을 바위 절벽에 눌어붙어 설한풍을 가릴 의지간도 없는 곳에서 겨울을 지내며 하나님이 온 인류에게 원하시는 길을 찾고 진리를 깨달아야한다.

실상 대둔산 어느 한 곳, 방안에 처박혀 지낸다고 해도 지루해서 못 할 일이다. 하지만 나의 집념과 사상에 하나님의 뜻이 더해지고, 나에게 뜻하신 바가 있는 그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눈보라 치는 바위 절벽에 엎드려 몇 주일씩, 몇 달씩 보낼 수 있었다. 진리를 깨닫는 그 큰일이 아니고는 못 할 일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건, 영계에 들어가지 않고는 못 할 일이라는 것이다. 육계에서는 그렇게 장기간을 보낼 수가 없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육계고 영계고, 기도이고 진리이고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대둔산에 있고 싶은 마음이 없고 자신이 없었다. 따뜻한 방에서 성경을 보고 기도하며 찬송도 하면 더 깊은 말씀을 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영이 강하여도 육신을 발판으로 하기 때문에 실상 오래 지탱할 수 없는 절대적인원리가 있다. 그렇다고 멀리 훤히 보이는 집으로 내려갈 수는 없고, 이 문제를 두고 눈비를 뒤집어쓰고 기도했다. 아련히 답을 받고 결정하기를, 고향 집 근처에 있는 옛 금광 굴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때는 대둔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이라서 조용했던 때다.

 

다릿골 기도굴로 옮겨 가다

 

나는 다릿골 기도굴로 들어갔다. 거친 돌바닥에 젖은 낙엽을 깔고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오지 않게 만들었다. 굴의 온도는 사시사철 17~18도로 방 안 온도였다.

제일 먼저는 찬송이다. 그것도 한두 곡이 아니다. 한 곡을 가지고 수십 번은 부른다. 옛날 찬송가 65, '나의 기쁨 나의 소망'이란 찬송을 특히 많이 불렀다. 마음이 크게 감동되면 육성을 떠나 영성의 소리가 흘러나온다. 다음에는 판이 바뀐다. "내 영혼의 그윽이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 나네." 하며 곡을 바꿔서 또 수십 번 불렀다. 보통 30여 번씩 부르게 된다. 그 다음에 감동되어 부르던 곡은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우니'로 시작하는 찬송이다. 옛날 친송가로는 95장이었다. 이쯤 되면 이제 육계의 정신이 아니라 나는 영계에 이른다.

 

상황이 바뀌어 기도하기 시작한다. 개인, 가정, 민족, 세계를 위해서이다. 그런데 어느 때는 잡념이 태산같이 박혀 버려 몇 시간을 몸부림쳐야 했고, 어느 때는 기도 중 무서운 환상이 보여 소리를 지르면서 싸울 때도 있었다. 무섭고 두려운 맘이 올 때도 적잖았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눈물도 흘리고 콧물도 흘리면서 24시간쯤 기도하면 더 할 것이 없다.

그때부터 성경을 보게 된다.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이다. 밤낮 연속해서 보면 1주일이 걸리고, 보통으로 열심히 보면 10일도 넘게 걸렸다. 중요한 곳은 붉은 줄을 쳤다. 그 후 좀 더 깊이 다룰 때는 신유의 능력과 이적들에 해당하는 성구에 파란 줄을 쳐서 표시했다. 사탄과 마귀들의 내용에는 검은 줄을 쳤다. 깨달은 것을 노트에 적으려 했지만 그 많은 것을 적을 종이가 없었다. 결국 깨닫고 머리에다 저장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겐 깨달음이 선생이 되었다. 그렇게 깨닫게 해 주시는 이는 성령님과 성자였다. 내가 교회에서 배운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이야기들이었다. 내용이 판이하게 달랐다.

성경을 읽을 때 처음엔 꼭 소리를 내어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밥을 못 먹고 힘이 없어지니 속으로 읽고 눈으로만 보게 되었다. 나중에는 더 힘이 없어지고 기진맥진해 가니 눈도 뜰 수 없고 않아 있을 수도 없었다. 그때는 엎드려 그동안 많이 읽은 성경을 윤곽으로 읽어 가고 깨닫게 된다. 육신은 반이나 넘게 죽었지만 정신은 더 청명해졌다.

 

▲ 예수님 말씀 듣고 시대 부활     ©jsmagazine.net

  

영의 죽음과 영의 부활

 

오늘 '부활'의 근원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 부활에 관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의 의심거리였고, 성경을 읽어도 여러 말씀들이 나를 헷갈리게 하여 평소 문제로 안고 있던 것이었다. 그동안 부활에 관한 성경 구절을 상고한 것이 머리에 스쳐 갔고, 똑똑히 생각에 잡혔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부활에 대한 성구가 생각났다. 그것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했다(2:17). 그러나 따먹었어도 죽지 않았다. 당시의 나이 계산법으로 930세까지나 살다 죽었다. 에스겔 184절을 보면, 죄를 지은 자의 그 영혼은 죽는다고 했다. 그것을 보고 ', 영혼이 죽는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영계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영혼에 대한 상식이 있고, 영혼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었으니 바로 납득이 갔다.

그리고 이사야 2619절을 보면, 그 날에 주의 죽은 자들이 살아난다고 했다. 구약에서도 부활의 소망이 심히 크고 큰 교리였음을 알 수 있다. 다니엘 12장에서도 부활에 관한 것을 암시하고 이야기하였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12:2)“

이렇게 예언된 구약의 부활의 소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역사적으로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부활의 도를 전했다. 요한복음 524절 이하를 보면,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지는 살아나리라." 하였다. 예수님은 자기 말을 믿고 자기를 보낸 자를 믿는 자는 실아난다고 하시며, 지금도 주의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살아나고 있다고 설교하셨다. , 고린도전서 1522절에서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하였다. 예수님은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죽었으나 자기 안에 있는 자들은 살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부활'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구세주, 하나님이 그 시대에 보낸 자를 믿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깨닫게 되었다.

이때 부활에 대한 찬송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 사망을 이기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 나도 다시 살았네 부활되었네 내가 부활되었네'

그동안 예수님의 부활만 외치고 알았지, 내가 영적으로 부활됨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고 너무 기뻤다. '이게 바로 부활이구나.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부활이구나. 죽은 뼈와 썩은 살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 부활, 영적 부활을 말하는 것이구나. 육체 덩어리의 부활이 아니구나.' 하고 기독교를 중심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자들은 모두 부활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약말씀을 수백 번 상고해 보면서 자세히 본문 말씀을 읽어보면 너무나도 절실히 나오는 구절들이 있다. 예수님도 잠자는 가운데서 먼저 일어나 첫 부활의 사람이 되었다고 하였다(고전15:20). 그다음 사람은 먼저 믿고 주님께 붙는 자들로 표현했다(고전15:23) 예수님은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였고(11:11~13), 죽음은 행동을 못 하는 행실의 죽음, 정신적 죽음,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영적 죽음으로 구분하여 말씀하였다(3:1~2).

고린도전서 1551절에서 52절까지 보면,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육신은 상식적으로 볼 때, 물질이라서 썩는 것이다. 썩지 않는 것은 영이다. 고로 영으로 다시 살아난다 함이다. 살아난다는 것은 사망권에서 생명권으로 옮겨 음을 말한 것이었다.

구약성경 에스겔서 37장을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마른 뼈들에게 주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여 "살아나라." 하니 그 뼈들이 연결되어 살아났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상황을 보시고 다 죽은 시체들로 표현한 것이다. 마른 뼈들이 하나님을 믿고 기능을 발휘하므로 군대가 되었다고 말한 것을 두고, 어떤 이는 죽은 시체가 살아난 것이라 한다. 아직 못 깨달은 자도 그리 생각할 줄로 안다.

사람들은 각각 수준대로 생활하고 살다 간다. 큰돈 있는 자는 큰돈을 쓰다 가고, 작은 돈 있는 자는 작은 돈을 쓰다 가며, 두뇌대로 살다 간다는 것이다. 성경도 깨달은 자는 깨닫고 살다 가고, 못 깨달은 자는 못 깨닫고 살다 간다. 예수님은 신약역사를 펴시면서 설교하실 때나, 혹은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부활에 관한 근본을 수시로 표현하셨다. 그 내용을 나로 하여금 성경을 통해 철저히 보게 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자기 부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사하고 돌아오겠다고 하였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8:21~22)." 하였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이 보는 '죽음'에 대한 관점이 나온다. 문자대로 해석한다면 죽은 자가 어떻게 죽은 자를 장사 지낼 수가 있겠는가?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장사 지낼 수가 없는 일이다. 전자의 죽은 자는 예수님 제자의 부친이 진짜 육적으로 죽은 것이고, 후자의 죽은 자는 그 시신을 묶어 땅에 묻어 주는 친척들을 비롯한 동네 사람들로,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말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낸 자를 안 믿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자들을 죽은 것으로 보았다. 육신이 아닌 영이 죽었다는 것이다. , 영이 죽었다는 것은 아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안 지키고 법을 범했을 때 그 영혼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짐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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