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창설의 선구자, 이수정]
한국 기독교는 천주교에 비해 약 100년가량 뒤인 19세기 말(1885년)에 전래 되었다. 천주교가 18세기 말부터 조선에 선교를 위해 노력하고 많은 희생과 박해를 치른 것에 비해 기독교는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선교를 펼칠 수 있었다.
19세기 말 한국은 근대화를 갈망했던 시기였고 기독교는 학교를 짓고 병원을 세워 주로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선교를 펼쳐 나갈 수 있었다. ▲ 이수정
한국 기독교에 가장 중추적이고 핵심적인 일을 한 인물 하면 이수정을 빼놓을 수 없다. 이수정은 강화도조약(1876년) 이후 서양 근대문물 수용을 위해 일본으로 떠난 신사유람단의 단원중 한 사람이었다. 1882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 구식 군대 간의 싸움인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를 서울에서 충주로 피신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공로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수정은 양반 대유학자 집안에서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였고 서양 문물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이수정은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일본의 대표적인 근대 농업학자인 쓰다센을 만나게 되어 일본의 선진 농업기술을 배우게 되었고 당시 열렬한 기독교 신자였던 쓰다센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전파받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천주교, 예수교를 엄격히 금하였고 천주교를 믿다가 목이 잘리는 천주교 박해로 인해 이수정은 기독교를 거부하였다.
쓰다센은 공자의 가르침보다 더 큰 가르침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며 공자의 빛은 호롱불과 같아서 방안을 비추는 빛이라면, 예수의 빛은 온 세상을 비추는 더 밝은 빛이라고 하였다. 조선의 유교보다 더 큰 가르침이며 일본이 이렇게 조선보다 빨리 근대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독교에 있다고 하였다. 조선이 기독교를 통한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통해 근대화를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쓰다센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설교가 예수교의 핵심 진리라고 가르쳤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천국을 얻을 것이요 애통해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받을 것이다"
이수정은 대 유학자로서 상당한 유학적 지식이 있었기에 쓰다센의 가르침은 이수정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쓰다센과의 대화는 밤이 새도록 진행되었고 조선의 가난을 해결하고자 일본의 선진 농업을 배우려고 했던 이수정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천국이 저의 것'이라고 한 구절에 큰 감명을 받았다.
육체의 배고픔이 불행이지만 정신적 배고픔의 해결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니,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지식이 예수님의 산상설교 가르침에 큰 감명이 되어 온몸에 녹아져 내렸다.
그날 밤 이수정은 쓰다센에게 받은 성경책을 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키가 큰 사람과 키가 작은 사람, 두 사람을 만났는데 책을 가득 담은 보따리를 들고 있기에 "그 책이 무엇이오?"라고 묻자 "이 책은 조선에 있는 모든 책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소중한 책이요, 조선의 그 어떤 책 보다 귀한 책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수정은 분명히 계시리라 믿었고 다음 날 쓰다센으로부터 성경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예배를 다니며 결국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후 이수정은 영어로 된 주기도문과 신약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힘썼고 일본 기독교 지도자 대부흥 성회 때 일본의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 앞에서 대표기도까지 하게 되었다.
근대문물을 배우러 온 이수정은 조선 땅에 선진 농업기술, 철도, 전기, 공장을 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의 가르침, 바로 성경임을 깨달았다.
이수정은 미국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우리의 고국에는 많은 백성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로서 조선 땅에 선교사를 파송해 주십시오. 나는 별로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오나 힘껏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1884년 이수정은 일본 선교사였던 맥클레이 선교사와 고종을 찾아가 한국에 선교사 파송을 허락해달라 요청하게 하였고 맥클레이 선교사는 고종 임금에게 우리는 기독교를 전하지 않고 조선에 학교와 병원을 세워 조선을 돕겠다고 하여 고종의 승인을 받게 되었다. ▲ 언더우드(위) 와 아펜젤러(아래) 이미지 : naver
1885년 4월 5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인천 제물포항에 우리나라 최초 선교사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수정의 간절한 염원과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조선에 들어오기 전 일본에서 이수정으로부터 두 달간 조선어와 조선문화, 조선 왕실과 조선에 대한 모든 정보를 배우게 되었고 한글로 쓴 신약성경 번역본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에게 주며 한국 기독교 탄생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수정은 한국 기독교 선교의 씨앗을 최초로 뿌린 한국 선교의 개척자 선구자로 평가한다. 한 사람의 열정과 노력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것이다.
[이재엽 작가 경력] 한국사 전문강사 <저작권자 ⓒ 제이에스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