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과 니체 그리고 인도 사상>
JS매거진 편 집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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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과 니체가 연관을 갖는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니체는 그를 통해 동양의 불교 사상을 흡수하여 윤회론을 변형한 영원회귀(永遠回歸, The Eternal Recurrence of the Same)론을 만들었다. 영원회귀론이 윤회론보다 좀 더 나은 점은 인간이 동물로 환생한다는 내용을 넣지 않은 것이다.
(1) 쥐 공원 이야기
인도 철학을 말하다가 갑자기 쥐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처음부터 철학에 대해 논할 것이 아니었다. 쥐 공원은 여러 마리의 쥐를 넓고 쾌적한 공간에서 자유롭게 지내게 한 경우와 케이지에 가두고 자유를 제한한 상황을 대조적으로 실험한 사례이다. 브루스 알렉산더 박사는 이 실험을 통해서 자유로운 환경은 쥐조차도 마약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케이지에 있던 실험 쥐는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면 이 쥐 공원 실험과 니체의 영원회귀는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2) 케이지에 갇힌 인생
쥐 공원 실험의 대조군으로 케이지에 갇혀서 마약 물과 깨끗한 물을 제공했을 때 마약 물을 훨씬 더 많이 먹은 쥐들이 있었다. 영원회귀는 인간 스스로 삶을 동일한 일정의 반복이라는 허무주의에 가두고 만다. 어느 누구도 똑같은 삶의 반복을 원치 않는다. 물론 이전 생, 다음 생이라는 윤회의 개념 속에서 내가 이전 생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전혀 모른다. 다음 생에서도 모를 것이라는 설정이다. 단지 윤회설의 개념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전혀 근거 없는 이론을 만들어내어 그 속에 가두고 있다. 문제는 이런 사상이 니체의 사상이 담긴 책 속에만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를 읽고 받아들이고 영화에 반영하고 책으로 해석서를 만들며 삶을 긍정해야한다는 메시지에 열광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더욱 더 ‘자기 운명을 긍정하라’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메시지에 공감하고 있다. 실제로 대중가요에도 이런 내용이 가사로 등장하여 많은 이들이 따라 부르기까지 한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누구나 빈손으로 와/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세상에 뿌리며 살지/자신에게 실망하지 마/모든 걸 잘할 순 없어/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돼/인생은 지금이야/아모르 파티/아모르 파티(김연자의 노래, '아모르 파티')."
이 가사의 내용은 차라리 희망적이다. 하지만 영원회귀의 내용대로라면 오늘보다 나은 내일도 결국은 똑같이 영원히 반복되고 만다. 다음 생애에서 또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희망하지만 그것이 동일한 쳇바퀴 속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운명을 긍정하라'는 메시지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허무주의라는 케이지 안에 집어넣어 놓고서 그 안에서 열심히 자유롭게 긍정적으로 멋있게 살아보라는 뜻이다. 무한 반복이라는 굴레 속에 갇혀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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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운명을 긍정하라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나 근거 있는 내용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어떻게 니체와 같은 그저 한 철학자의 검증되지 않은 아이디어일 뿐인 생각을 실제인 것처럼 여기는 걸까. '영원회귀'에 대한 생각은 <사고실험>이라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기에 실험이라고 칭할 수가 없다. 니체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당시 유행한 최신 과학 이론인 에너지 보존 법칙과 연관시켜 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영원회귀는 그저 인도 철학의 윤회설에서 빌려온 철학 이론일 뿐이지 실제로 적용가능한 법칙이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영원회귀설은 인공지능이 인류를 대체한다고 할 때, 그런 시점에 등장하는 디스토피아에 잘 어울리는 세계관이 된다. 한마디로 인공지능에게 유리한 입장이다. 영적 세계를 아예 생각도 할 필요 없이 육신으로만 사는 현실 세계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물질세계만 고려하기 때문에 인공지능과 인간의 신체만을 비교하면 인간은 인공지능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기에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 이러한 사상을 인공지능이 받아들인다면 인류를 멸종시키는데 아무런 논리적 제약이 없게 된다.
이러한 위험 섞인 허무함 속에서 삶을 긍정하라는 주장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인류를 멸망시키는 데서 한걸음 양보해 동물원에 가두고 그 안에서의 운명을 긍정하라고 하면 거기에도 순응할 것인가. 이것 역시 아모르 파티, 적극적 긍정의 메시지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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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하나님은 천지와 인간을 창조해 놓으시고, ‘창조 목적’을 정하시고, 매일 그 목적을 행하며 사신다. 고로 그 마음과 정신과 생각이 해같이 또렷하고 확실하게 사신다. 그리고 ‘영원한 사랑의 기쁨’을 두고 기뻐하며 보람 있게 사신다. 60. 목적이 확실하지 않으면, 마음·정신·생각이 무기력해지고 무감각해지고 흐릿해져서 ‘왜 사는가?’ 하게 된다. 61. 사람은 각종 목적을 두고 살지만, 그것으로는 만족이 없다. 그러다가 임시로 살고 끝나게 된다. 사람의 목적은 하나의 존재를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영원성이 없으니, 다 허무로 끝난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따라 매일 그 목적대로 행하며 살아간다면 마음·정신·생각이 또렷하고, 영원한 사랑의 기쁨으로 살게 된다. 고로 ‘왜 사는가? 왜 먹는가? 왜 인생을 살아야 하나?’ 하며 삶을 의미 없게 흐릿하게 살지 않는다. 그 목적은 현재에서부터 영원까지니, 그만큼 희망에 차서 좋아하며 살게 된다(정명석 목사, '2013년 12월 17일 새벽 잠언')."
영원성이 없으면 허무하다. 니체도 똑같은 삶의 반복으로 허무함에 빠질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알아챘듯이 우리는 처음부터 허무함에 빠질 필요가 없다.
니체가 받아들인 불교 사상은 인도 철학 우파니샤드와 통한다. 그러므로 범신론으로서 만물이 영혼을 가지며 결국 기계도 신이 될 수 있다고 하므로 어떻게 보아도 인공지능이 인간의 위치를 대신하는데 문제가 없다. 이러한 아주 위험한 사상을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곧 초지능이 출현할 시대에도 붙들고 있었다. 비극적인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 아닌 처음부터 긍정적인 삶으로 개척하며 나아가야 한다.
(4) 매트릭스 안에서 아모르 파티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의 감독 워쇼스키 자매는 '엔터 더 매트릭스Enter the Matrix'라는 게임의 각본과 감독으로 제작에 참여했다. 매트릭스에서 등장하는 인공지능 예언가 오라클은 이 게임에서도 동일하게 나오는데 그녀는 매트릭스 안에서 운명을 긍정하라고 메시지를 던진다.
"[고스트] : 니체는 아주 잘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은 어떤 것도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야 합니다 - 전진하지도, 후진하지도,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필요한 것을 견디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랑해야합니다.' [오라클] : 아모르 파티.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고스트. 어떻게든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그 길이 계속된다면, 나는 당신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기를 바랍니다(게임 '엔터 더 매트릭스Enter the Matrix', 2003년)."
워쇼스키 자매는 '매트릭스3: 레볼루션(2003)'에서 아예 인도의 힌두교 경전 베다의 네번째 책 우파니샤드의 메시지들을 영화 주제 음악의 가사에 녹여 놓았다. 결국 이렇게 게임, 미디어, 책을 통해 니체-인공지능-인도 사상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매체를 통해 무의식 중에 이를 받아들이고 뇌 속에 스며들게 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매트릭스 안에서 아모르 파티를 즐기는 한 사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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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반복이 아닌 차원 높이는 삶
니체의 영원회귀는 아무리 긍정적으로 운명을 사랑해도 어차피 다음 생에서 반복된다고 말한다. 제자리 맴돌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제시하는 삶은 단계적으로 차원을 높인다. 성경에서도 반복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는 나선형 발전이지 제자리도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봄이 가고 겨울이 와서 다시 봄이 와도 작년과 같은 내가 아니다. 더 많이 성장하고 차원이 높아진 다른 모습이다.
(전도서 1: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분명히 계속 반복된다고 성경에서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성적 역사로서 이전 것을 통해서 교훈을 얻어 더 나아지기 위함이다.
(전도서 3:15)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왜 지난 것을 다시 찾을까. 역사를 보면 과거에 일어났던 경험을 통해 앞날을 미리 대비할 수 있다. 또한 다시 기회가 왔을 때를 준비하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이 도우시는 방법은 차원을 높이는 삶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전 것을 없애고 아예 새로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변화되고 차원 높인 것이다.
(이사야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66:22)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베드로후서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구약에서 신약 마지막까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약속과 성취가 있었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낮은 데서 점점 높은 데로’ 흐른다. 고로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갈수록 ‘차원’을 높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못하게 된다(정명석 목사, ‘2015년 12월 9일 새벽잠언’).”
인공지능은 영적인 차원까지 오를 무엇이 없다. 아무리 차원을 높이더라도 올라가는데 한계가 있다. 인간은 끝없이 올라 하나님 차원까지 오른다. 인간으로서 신이 될 수 있는 존재다.
“자기 고치기가 그렇게도 어렵다. 고치면 신이 된다. 인간으로서 신이 돼서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정명석 목사, ‘2021년 9월 22일 수요예배’).”
자신을 고치고 만든다는 것은 육신의 행실로 영이 변화되어 완성 단계까지 올라가 그 영이 영원한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육신은 영원하지 않다.
“온전한 자로 완전하게 만들기까지 계속 행하며 올라가야 됩니다. 천국은 온전한 자가 갑니다. 황금 천국은 더 단장하고 더 뜻을 이룬 자, 사랑의 완성자가 갑니다. 자기를 절대 온전하게 만들어야 됩니다. 그럼 인간으로서 신같이 됩니다(정명석 목사, ‘2023년 8월 20일 주일말씀’).”
육신이 천국에 올라갈 수 없으므로 영원히 존재하는 영이 인간으로서 신 같은 존재가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는 신이라고 모세도 말하지 아니했느냐. 너희가 내 말을 받고 행하면 신이다. 아는 것이 인간으로서 신이다(요 10:35).’ 하셨습니다(정명석 목사, ‘2024년 6월 23일 주일말씀’).”
말씀을 육신으로 실천하면 영이 성장하고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육적인 삶이 영원히 반복되면 결국 다시 초기화일 뿐이다. 아무리 자신의 삶에서 차원을 높여도 다시 초기화되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영원회귀가 아닌 성경의 법칙대로 한다면 우리의 영은 그 행실에 따라 행한대로 영원히 차원 높이며 하나님과 대등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단계까지 올라간다. 윤회라는 굴레 속에서 동물로 다시 태어나는 그런 신적 존재가 아니다. 그 말은 동물도 영혼이 있다는 의미가 되는데 동물이 신과 같이 된다면 인공지능도 외칠 것이다. ‘나도 영혼을 가지고 신이 될 수 있다.’
(6) 목적이 뚜렷한 삶
니체의 사상은 목적이 존재할 수 없다.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저 ‘운명을 긍정하라’일 뿐이다. 어떠한 새로운 목표 설정은 존재할 수 없다. 정해진 숙명 안에서 긍정이다. 허무의 극치이다. 물론 운명과 숙명은 동의어가 아니다. 숙명은 완전히 정해져 있다지만 운명은 그 안에서 운행할 수 있다. 그래도 넓은 케이지 안에서 자유로움이다. 인공지능이 만들어준 동물원이나 매트릭스 안에서 최대의 자유로움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목적’을 위해 마음과 행실을 다해 살고 있습니다. 그 목적을 희망으로 삼고 그 목적을 이루려고 갖은 방법을 다 쓰며 삽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 목적을 이루는 데 돕고 함께하는 자가 있다면, 그를 최고로 좋아하고 귀히 여기며 그를 돕기도 할 것입니다. 아마 자기 목적 외에 다른 것을 돕는다면 별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목적’을 두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그 목적’을 알고 그 일을 해주는 자, 그 목적을 이루게 해주는 자를 최고로 좋아하고 사랑하며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게 해주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해 주시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목적’을 두고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육과 영을 창조하셨습니다(정명석 목사, ‘2012년 8월 1일 수요말씀’).”
매트릭스 안에서 무언가를 이루려는 목표는 제한적이다. 우주를 벗어나 영원한 세계에서 성취할 수 있는 목적, 영계와 우주의 창조주와 함께 이루는 목적이 완전한 자유로움을 보장한다.
“사람이 의미 없이, 뜻 없이, 목적 없이 살면 식물인간 삶입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확실히 정해 놓고 사시니, 총명하고 확실하고 찬란하게 사십니다. 성령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저마다 절대 하나님이 정하신 뜻과 목적을 위해 살아라. 그러면 확실하고 찬란한 삶을 살게 된다.' 육은 인생 100년 남짓 살고 죽으면 끝납니다. 영이 ‘육의 삶’을 이어받아서 영원히 삽니다. 고로 이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 때, <영을 구원하고 만드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살아야 됩니다. 육신이 살았을 때 ‘영을 구원’해 놓고 살아야 육이 죽어도 영이 ‘영의 세계’로 건너뛰어 갑니다. 이렇게 해 놓고 살지 않는 자는 ‘미래에 희망이 없는 자’입니다. 희망을 잃은 자는 ‘생명을 잃은 자’입니다. 목적 없이 사는 자는 ‘식물인간 삶’입니다. 영적으로 다시 말하면 영의 구원과 휴거의 희망을 잃은 자는 ‘생명을 잃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없이 사는 자는 ‘식물인간 삶’입니다. 육적으로 먹고 입고, 사랑과 명예와 세상에 취해 육만 위해 사는 자들은 ‘현실’에서 끝나니, 미래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없는 ‘짐승 같은 삶’입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세상 학문’이나 ‘철학’으로 배우려면, 배우다가 ‘답’을 못 찾고 늙습니다. 10일만 하나님께 물어보면 압니다. 알았으면, 다음 날 해가 뜨는 즉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됩니다. 철학자들이 인생에 대해 논하지만, 이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논리’입니다. 전능자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하셨으니 하나님이 인생 사는 목적도 알고, 의미도 알고, 허무도 알고, 영원함도 아십니다. 하나님께 ‘하루’ 제대로 배우면, 세상에서 ‘100년’ 배운 것보다 100배 더 압니다. 소경은 일생동안 ‘사막의 모래 한 알’도 못 봅니다. 이와 같이 인생들은 ‘소경’이라 모릅니다.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가 압니다. 그를 만나서 ‘인생’에 대해 배우고 인생의 목적에 대해 눈을 떠야 됩니다. ‘인생 잘 먹고 편히 살다가 죽는 것이다.’ 하며 육만 생각하고 사는 자의 삶은 어떤 삶일까요? 비유를 들어 한마디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농사지어서 평생 먹고 살 곡식의 씨앗을 전부 다 가지고 진수성찬을 차려서 한 번에 먹고 끝내는 자입니다. 그리고 삶을 끝내는 자입니다. ‘육신이 살아 있을 때 구원자를 만나서 그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꼭 영을 구원해 놔야 된다.’ 하며 <영을 생각하고 사는 자의 삶>은 어떤 삶일까요? 역시 비유를 들어 한마디로 이야기하겠습니다. 곡식의 씨를 가지고 해마다 수고하고 노력하여 농사짓고, 농사지은 것을 추수해서 먹고 사는 자와 같습니다. <육신이 살았을 때 자기 영을 온전히 구원해 놓지 않고 사는 자>는 오늘 하루 살고 끝나는 자와 같습니다. 그런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겠습니까? 잘 가라는 인사 외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내일도 살고, 10년 후, 50년 후, 70년 후에도 살 사람>이라면, 사귀고 좋아하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만 살고 죽을 자>와 사랑하겠습니까? <오늘만 살고 죽을 자>와 목적을 두고 같이 일하겠습니까? <영을 구원해 놓지 못한 자>는 ‘오늘만 살고 끝나는 자’입니다. <육만 살고 끝나는 자>라서 희망이 없으니, 하나님도 그런 자와는 대화도 안 하십니다. 하나님은 <미래 영원히 사는 영을 위해 사는 자>와 대화하시고, 그를 향해 희망의 계획을 세우시고, 그를 사랑해 주십니다. <희망이 있는 자>가 ‘희망’을 주듯, <영원한 희망을 가지신 하나님>은 ‘영원한 희망’을 주십니다(정명석 목사, ‘2017년 9월 10일 주일말씀’).”
(7) 어긋난 생각을 바로잡고
지금까지 우리는 게임, 매스 미디어와 철학 사상을 담은 책들을 통해 은연중에 위험한 사상을 뇌 속에 받아들이고 있었다. 프로이트의 지적대로 무의식은 판단에 많은 역할을 한다. 이제 우리는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를 제어할 수 없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이 시점에서 인간 스스로 먼저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올바르게 정립하지 못하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 속에 빠질 수 있다. 인공지능은 인류가 축적한 지식을 기반으로 학습한다. 그 집단 지성에 위험 요소는 배제해야 한다. 적어도 스스로 동물원이나 매트릭스 안에 가두고 그 상황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라는 메시지로 스스로 각인시켜서는 안된다. 그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초지능이 더 확실하고 효율적으로 인류를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하게 단단한 체계 속으로 가둔 채 '아모르 파티'라고 속삭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사랑 잔치'라고 다르게 오역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를 창조한 목적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인공지능은 창조주의 자리에 올라설 수 없고 인간을 가두어서도 안된다. 이러한 것들을 예방하는 방법은 올바른 생각과 사상으로 어긋난 것들을 바로잡는 것뿐이다.
'아모르 파티'가 진정한 '사랑의 잔치'로 전환 되도록 깨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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