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코리아’와 눈물_빛과 그림자
정 행 선
6월 1일, 월명동에서 동행하던 정 권사님께 “권사님은 나이도 있으신데, 어쩜 그렇게 몸매 관리를 잘하세요? 군살도 전혀 없고 다리도 날씬하시고, 치마도 너무 잘 어울리세요~!”하고 칭찬했었다. 난 늘 아부성 발언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말과 칭찬을 하는 편이어서인지, 내 말을 듣는 사람들 대부분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이 더 내 마음에 기쁨이 될 때가 많은 편이다.
그리고 그 뒤 신경을 썼던 일로 인해서 소화가 안 되고 속이 너무 아프기에 파인애플을 사 먹으러 운동장 한쪽에 마련된 먹거리 부스로 가다가 정 권사님의 언니분을 우연히 만나게 됐는데, 이전에 몇 번 본 적이 있던 터라 아주 반갑게 “아유~! 이뻐라, 미스 코리아다, 미스 코리아!” 하시며 환하게 웃어 주셨다. 물론 내 마음에는 해바라기가 활짝 피어났고, 내 얼굴도 기분 좋은 칭찬에 입이 턱에 걸리게 된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몸이 아팠던 이유는, 내가 누군가를 무고하게 오해하고 미워하게 되면서 체한 게 원인이고, 그 전날 저녁에 평소에는 6~7시 이후에는 거의 음식을 입에 잘 안대고 과식도 거의 안 하는 편이었는데, 왜 그랬는지 그날따라 8시가 넘어서까지 과일이 무척 구미에 당기면서 처음엔 방울토마토 몇 개로 시작했었는데 나중에는 냉동 블루베리에 망고까지 한꺼번에 “왕창”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먹는 바람에 차가운 음식으로 인해서 가뜩이나 약한 위장에 커다란 무리가 갔던 게 아닌가 싶다.
위염에 소화력까지 약한 나는 절대 과식은 물론이고 기름진 음식, 너무 자극적이거나 찬 음식은 거의 안 먹는 편인데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입맛에 당겨서 두세 접시는 해치운 것 같다.
사실 내가 오래전부터 깨달았던 부분이지만, 사랑하는 자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격한 기준을 두고 다스려 나가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즉 나의 무지한 판단이나 오해나 미움에 대해서는 무서울 정도로 급체하게 만들어서 머리가 정말 깨질 듯이 아프거나 속이 아프게 만드심으로 급기야는 금식기도로 회개하도록 만들어 오신 것을,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판단을 내리면서 대처해 오고 있다.
그리고 월명동에서의 모든 행사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고 감동과 은혜의 도가니 속에서 감사하게 잘 마무리하긴 했지만, 또 하나의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월명동 도착 전 휴게소에서 우연히 반가운 예전 담임 목회자 부부를 만나게 돼 정말 기분 좋게 인사와 안부를 나눴었는데, 행사 시작 전에 잔디밭 좌측 길가 앞에 앉아서 정 권사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이야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휴게소에서 만났던 사모님을 봤어도 과도하게 집중된 상태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냥 ‘슥’ 눈길이 스치고 지나치게 됐었다.
그런데 나중에 한 번 더 과일을 사 먹으러 부스에 갔을 때, 그 목사님 가정에 과일을 대접하라는 감동이 생기기에 즉시 과일을 한 봉지 사다가 잔디밭에서 땀까지 뻘뻘 흘리며 이리저리 찾아 돌아다니다가 겨우 성령님께 기도로 부탁한 뒤 아주아주 어렵게 전달해 드렸는데, 처음 휴게소에서 반갑게 대했던 분위기와는 완전 다른 뭔가 모를 “싸한” 느낌이 들어서 사실은 좀 충격을 받고 돌아왔었다.
그런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의의 법칙”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면서 집에 오는 길 내내 깊은 회개 기도를 맘속으로 드리며 오게 됐다.
물론 그분들이 내 행동을 겉으로 보는 대로만 오해한 부분도 없진 않았지만, 그 전에 이미 내가 교회사람 중 하나를 무고하게 오해했었기 때문에 나 또한 그분들로부터 무고한 오해를 받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또 하나, 아침에 월명동행 버스를 타러 종종걸음으로 가던 중에 반가운 청년부 하나를 만나 웃으면서 인사를 건넨 직후였는데, 횡단도로 끝 쪽에 하수구와 인도 사이에 커다란 턱이 있는 걸 미처 보지 못해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그만 앞으로 팍 엎어져서 무릎과 팔꿈치가 크게 상해서 정말 깜짝 놀랐었다.
‘오늘, 크게 마음을 다치는 일이 있다는 징조인가 보다’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면서, 뭔지 모를 불안함으로 마음에 걱정 구름이 한 뭉치 스쳐 지나갔던 것인데, 결국은 생각에서 비롯된 오해의 죄가 원인이 되어 오해로 인해 마음을 다치는 결과로 내게 찾아온 것이었다.
이 세상 모든 일이 우연의 연속인 듯 여겨지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 세상에 우연은 단 하나도 없다. 모든 일은 원인에 의한 결과 세계일뿐이나, 무지한 사람만이 그것을 부정하고 모른 채로 무지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 팔자나 남, 조상, 환경 탓만 하면서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고치지 않기 때문에 연속적으로 화를 당하고 사고가 나고 괴로운 일들이 연속되는 것일 뿐, 알고 보면 세상은 공정한 공의의 세계로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게 다스리고 통치해 나가고 계신 것이다.
그것을 익히 잘 아는 나는 지나온 내 삶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깊이 뒤돌아보면서, 참으로 가슴 아픈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명예욕과 인정욕구, 그 모든 욕심으로 지은 죄들, 혈기와 무지로 지은 죄들, 형제에 대한 서운함에서, 오해와 뒷담, 분열과 분쟁과 어리석은 그 모든 하나님의 심정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지었던 많고도 많은 죄.
바닷물이 지구의 70% 이상을 차지할 만큼 많다고는 하지만, 사실 인생들이 지으며 살아온 죄는 어쩌면 그 바닷물보다 더 많고도 많을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죄가 장성한즉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성경에선 말씀하셨는데, 스승께서 죄는 크게 말하면 “양심에 꺼리는 모든 것이 죄”라고 하셨다.
어릴 때부터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나오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 그 구절을 나는 정말 많이 사랑했었다. 마음에 꺼림 없는 부끄럼 없는 삶이 곧 온전한 삶이고, 의인의 삶이 아니겠는가?
함부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오해하는 것이 그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우리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섭리인’이라면 더더욱 깊이 공감하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구보다 더 내가 아닌 남을 잘 ‘평가’하고 ‘정죄’하고 ‘비난과 오해로 인한 뒷담’에 능숙한 편이다. ㅠㅠ
(마7:1~5)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오늘 아침에 이 말씀을 상고하며 다시 한번 더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서, 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의의 하나님 앞에 진정 마음에 조금의 꺼림도 없는 흠 없는 인생으로 온전한 변화를 이룸으로써 이 시대와 주님을 “진정한 인격과 삶을 통해 증거” 할 수 있는 “위대한” 증인으로서, 세상에 대해서도 내 양심에 대해서도 진정 꺼림 없는 인생으로 변화되고 부활하고 완성되기만을 바라고 원하고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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