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진리는 변하지 않아야 진리인가[2부]

2부 진리를 대하는 태도

jsmagazine.net | 기사입력 2023/11/15 [20:47]

[칼럼]진리는 변하지 않아야 진리인가[2부]

2부 진리를 대하는 태도

jsmagazine.net | 입력 : 2023/11/15 [20:47]

2부 진리를 대하는 태도 

 

편 집 부 작성

 

진리에 대해 판단하는 자들이 있다.

처음 가르치던 교리가 바뀌고 변하면 진리가 아니라는 논리를 주장하는 이들이다.

이들의 주장이 옳은 것 같지만 따져보면 악의적인 흠집내기 악평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인식의 차원을 높여야 한다.

 

 

 

 

(1) 전지전능함에 대한 오해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라는 제목의 찬양이 있다(김대환 작곡).

 

이는 하나님이 전지하시므로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어떠한 실수도 하지 않으신다는 의미다그러나 우리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은 후회를 하신다.

 

(사무엘상 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물론 이는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라 인간의 잘못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울이 변할 것을 모르셨을까.

질문이 잘못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알 수가 없는 것이지 모르셨는지가 아니다.

분명히 계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지만 인간과 함께 그의 인간의 육신을 쓰고 일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선택에 따라 실패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한다.

 

(창세기 6:6)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세기 1장에서는 분명히 보기에 좋으셨던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인간이 자기 원하는대로 함부로 하니 한탄하시는 모습이다.

전지전능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만이다. 인간과 함께할 때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 때문에 모든 것을 미리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상황에 따라 하나님은 최선의 선택을 다시 거듭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말씀도 법도 바뀌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인간 탓이다.

그렇다고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 따져물어서는 안된다.

창조목적 자체가 완전한 사랑이었기 때문에 완전한 자유의지를 줄 수밖에 없었다.

 

 

 

 

(2) 세례요한과 십자가 복음

 

예수님이 처음부터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은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분명하게 처음 전하신 말씀은 천국이 가까웠노라 하시고 인자가 구름타고 영광 중에 오실 것을 전하신다. 다시 말해서 영광의 주로서 성경의 예언을 이루며 나타실 것을 말씀하셨지만 언제부터인가 비로소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신다.

그 시점이 언제일까.

바로 마태복음 14장 세례요한의 죽음 이후이다.

세례요한이 자기 사명을 잊고서 헤롯 왕의 결혼 문제를 지적하다가 참수형을 당한 뒤 마태복음 16장에서 '비로소' 고난받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신다.

 

(마태복음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 말의 뜻은 그 전에는 십자가 고난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의미다.

오히려 인자가 이미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다고 하시면서 십자가 대속과 상관없는 죄 사함의 능력을 드러내신다.

 

(마태복음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이미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시기 전부터 죄를 사하고 계셨다.

신약권 성경 교사들이 가르치는대로 오직 십자가 보혈에 의해서만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씀의 방향이 '영광의 주'에서 '고난의 주'로 바뀔 수 있는 것일까.

세례요한의 사명 실패가 원인이다.

결국 땅의 편, 육적인 사명자가 순교가 아닌 불필요한 죽음으로 인해 발판이 무너지자 뜻이 깨어져 말씀의 방향마저 바뀌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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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역사와 섭리 역사

 

정명석 목사님도 초창기에 말씀을 전하실 때 요시야에 대한 과거 기록을 보면 전역사(*)가 느고 왕의 입장이고 기독교(기성)가 요시야로 볼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전역사가 예수님을 실패했다고 부정하면서 뜻이 돌아가자 '무지 속의 상극 세계'라는 30개론 기본 교리 말씀의 방향이 바뀌었다.

물론 이 강의는 요시야와 느고의 위치에 이스라엘 민족과 모세, 종교재판과 코페르니쿠스, 천주교와 루터 등 다양한 상황에 따라 대입할 수 있는 것이 맞지만 이후로 더이상 기독교와 전역사의 관계를 요시야와 느고의 위치에 넣어서 설명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서 왜 말씀의 방향이 바뀌느냐면서 그래서 이 말씀이 잘못되었고 진리가 아니라고 말하면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받을 뿐이다.

 

(4)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승이며 그리스도이시다

 

정명석 목사님은 초창기 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줄곧 일관성 있게 이 모든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고 자신을 연단시켜주시고 예수님이 신랑이시고 자신은 신부의 입장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서 증거하였다.

2012년 성자와 예수님이 본체와 분체로서 다른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뒤로도 변함없이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고 증거해왔다.

예수님은 초림 때 성자가 임하여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고 지금 이때에 성자와 일체된 영으로 재림하셨다.

물론 성자 본분체 인봉을 떼기 전에는 예수님을 성자로 인식하신 것이 맞지만 그때는 성자께서 예수님의 영을 쓰고 그렇게 나타나시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 이것은 진리가 변한 것이 아니다. 더 높은 차원의 인식 단계로 인봉을 풀어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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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치와 원리

 

원리는 뿌리, 줄기와 같고 이치는 가지와 같다.

뿌리와 줄기가 흔들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지는 다양하게 세분화되고 바람에 흔들리기도 한다.

뿌리와 가지에 해당하는 원리만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역사 방법과 말씀을 이루시는 것이 이 나무와 같아서 원리와 이치에 맞게 행하시기 때문이다.

다르게 보면 원리처럼 절대 변하지 않는 영역도 있고 이치와 같이 흐름에 따라 유연한 것도 있다.

정명석 목사님은 예전부터 원리와 이치에 대해서 자주 설명하시고 이해할 수 있게 말씀하셨다.

 

"원리는 가다가 길이 막히면 못가나 이치는 길이 막히면 돌아서 가다가 다시 그 길로 갑니다. 나무 뿌리는 원리이고, 가지는 이치입니다. 가지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풀어서 해석합니다(정명석 목사, '199661일 아침말씀')."

 

진리는 원리와 이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원리로서 곧바로 갈 때도 있지만 돌아서 가다가 다시 그 길로 가기도 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절대 불변이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고정관념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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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진리는 질리지 않는다

 

"예수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6).' 진리를 배워야 질리지가 않아요. 진리가 아닌 것을 배우면 질려요(정명석 목사, '2020116일 새벽말씀')."

 

"13. <진리>여야 질리지않는다(정명석 목사, '2017213일 새벽 잠언')."

 

필자는 이 인용문에 대해서 한 가지 의미를 더 덧붙여보고 싶다.

진리여야 질리지 않는다는 내용에 더하여 계속해서 차원을 높이기 때문에 질리지 않는다고 말이다.

 

(7) 진리에 대한 태도

 

기성의 기독교는 진리를 맹신한다.

맹신한다는 표현은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대하는 태도를 문제시 삼은 것이다.

진리는 존재하지만 그 진리가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 않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진리는 자유케하는 것이지 배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지금까지 기독교가 보여준 모습은 진리로 인해 자유롭게 된 것이 아니라 폐쇄적이고 배척하는 모습을 보여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단 논쟁에서는 언제나 강력한 판단을 일삼아왔다.

판단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로마서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고린도전서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진리는 분명 선과 악을 쪼개는 기준이 되지만 그렇다고 심판의 권세까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판단과 그에 따른 심판은 하나님의 권한이다.

 

 

 

 

(8) 진리 앞에 올바른 태도

 

대화다.

진리는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과 기도로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리가 불변일까.

 

진리는 불변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온전한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다.

자기 식의 정의를 하나님께 강요하는 모습이다. 아니 스스로 하나님의 모습을 재단하고 있다.

진리는 하나님이다. 의지가 있고 자유로운 존재자다.

진리와 대화해야한다.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변하시는 부분과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말하면 감히 함부로 말한다고 지적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여주신 모습들을 보았을 때 그렇다고 하면 어느 일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한계가 생기지만 적어도 틀린 말은 아니게 된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변화된 부분이 분명하게 있다. 이런 측면에서만 보아도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이 아니다.

물론 진리의 영역을 어디까지로 하느냐의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성경 속의 말씀이 불변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이치적이다.

인간의 수준과 차원에 따라 다르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변한 이유다.

인간이 발전하고 올라가는 만큼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것 뿐 아니라 아예 호칭도 대함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법도 바뀌고 대함 자체가 달라진다.

 

 

 

 

(9) 하나님이 사명자를 부르시는 호칭

 

모세를 종이라 부르셨다.

 

(민수기 12: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때는 종이라 부르시는 것이 맞다.

예수님 때 이르러서는 아들이라 부르신다.

 

(마태복음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 시대에는 신부라 부르신다.

 

(10) 예수님께 성전세를 내라 한 이들

 

(마태복음 17: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세금 걷는 자들이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하러 오신 하늘의 보낸 메시아라는 것을 모르니 베드로에게 성전세를 내어야 한다고 한다.

이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오히려 세금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마태복음 17:26)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하지만 오해하지 않도록 세금을 내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17: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나사렛 출신 이단이었다.

 

(사도행전 24: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그러나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이셨다.

 

(마태복음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지만 베드로의 이러한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시면서도 아직 과정을 통해 스스로 깨닫지 못한 자들에게는 직접 느끼고 시인할 때까지 감추라고 하신다.

 

(마태복음 16: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반면에 깨닫고 아는 자에게는 자신을 스스로 '내가 그'라고 드러내기도 하신다.

 

(요한복음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이와같이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보이게 된다.

하나님은 시대 사명자를 대하는 대로 다르게 나타나신다.

 

(사무엘하 22:27)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이다

 

스스로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는 거울을 볼 때와 같은 입장이다. 자기 마음 상태에 따라 거울처럼 그대로 드러낸다.

자기 마음이 깨끗하면 천국을 볼 수 있다.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예수님을 본 자가 곧 하나님을 본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하나님을 믿고 뜻을 따르는 자들이 성장하고 성숙되는 만큼 더 완성되게 보여주시고 깨닫게 해주신다.

 

 

▲ 승천하시는 예수님 [이미지 : Google]    

 

 

(11) 물어보라

 

하나님께 물어봐야 한다.

 

"상대 마음이 자기 마음과 같은지 꼭 확인해야 압니다. 확인하면, 자기만 좋게 생각하고 한 것을 알게 됩니다. 주의 마음을 벗어나 살면, 속고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성령의 마음인가?’ 항상 기도하고 주께 물어보고 행해야 됩니다. 항상 서로 교통하면서 의논할 것을 해야되는데, 혼자만 도취해서 분위기 따라 하면 점점 혼자 곤고한 길을 가면서 모든 자들의 걱정거리가 됩니다. 하늘과 의논 없이 행하면 결국 헛수고가 되고, 오히려 자기도 인심만 잃게 됩니다(정명석 목사, '2023101일 주일말씀')."

 

'교리가 변했다. 처음 가르침과 다르다'면서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악평하고 뒤에서 수근거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묻고 사명자에게 물어봐야 한다.

 

(12) 불변이기를 바란 것은 인간이다

 

인간은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전도서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라고 보는 것보다 창조 때부터 하나님을 닮게 만드셨다라든지 어떻게 표현하든 상관없다.

변하지 않는 것을 사모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인간의 특징인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진리 역시 절대로 변해서는 안된다는 잣대를 만들어서 들이대는 순간 그것은 진리가 아니게 된다.

진리 자체는 상당히 유연하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자기 수준에서 진리는 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기준을 들이대며 함부로 판단하는 자들은 인식의 차원을 높여야 할 것이다.

3부에서는 커다란 인봉이 풀리면서 다른 말씀도 함께 원재의 자리로 방향을 잡는 경우도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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