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숨결속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출애굽기 21:22-24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싸우다가 그들이 임신한 여자를 쳤는데, 그녀의 아이만 유산되고 (다른) 해가 없으면, 가해자는 반드시 그 여자의 남편이 그에게 정하는 대로 벌금을 치르되, 재판관을 통하여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그는 목숨에는 목숨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화상에는 화상으로, 상처에는 상처로, 생채기에는 생채기로 지불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로 통용되는, 구약성서의 '동태복수법'이라고 알려진 규정입니다. 그래서 피해자는 반드시 동일한 정도로 상대에게 복수해야만 하던 시대였다고 오해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 규정과 창세기 4:23-24를 비교해 보면, 전혀 다른 느낌이 들 것입니다. "라메크는 자기 여자들에게 말했다. '아다와 칠라, 내 소리를 듣게. 라메크의 여자들이여,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게. 정녕 나는 내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내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네. 카인님 (때문에) 일곱 배로 보복을 당했다면, (나) 라메크 (때문에는) 일흔일곱 (배로)!'"
(아벨을 죽이는 카인 / 이미지, Daum)
상처 하나에 사람 목숨을 취하고 생채기 하나에 아이 목숨을 취하던 거의 무법시대이던 옛 시대에 비하여, 모세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에는 이까지만, 눈에는 눈까지만 해하라"는 한계를 두신 것이지요. 그만큼 복수하는 이가 자기 마음을 추스르고 일정 부분 상대를 용서하도록 하신 일종의 '용서 규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용서와 자비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도피성 규정', 즉 의도하지 않고서 단지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 그 살인자가 피신할 수 있는 도피성에 관한 규정이지요.
이처럼 구약성서의 법규들은 얼음처럼 냉혹하고 잔인하던 옛 '무법시대'를 점차 전능하신 분의 따스한 은혜와 자비의 온기로 녹여 가는 '율법 시대'로 변화시키던 상대적으로 '따스한 법'이었습니다. 물론 그 율법들에도 오늘날의 시점에서 바라볼 때는 냉혹하고 잔인하게 보이는 조항들이 여럿 있지요. 그것은 아무래도 백성들의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했던 '채찍' 같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러한 '쓰라림'들에 관하여 훗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치유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눈에는 눈을, 이에는 이를!'하고 전해졌다는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건대, 악한 이에게 맞서지 말거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다른 쪽 뺨도 돌려 대거라. 그리고 너를 상대로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이에게는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그리고 누가 너를 억지로 천보千步를 걷게 하거든, 그와 더불어 이천보를 가 주어라. 너에게 구하는 이에게는 주고, 너에게 꾸려고 하는 이도 물리치지 말거라."(마태복음 5:38-42)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생애 시절에 읽고 실천하시던 구약성서의 율법들에서 이러한 '온기와 자비와 사랑'을 느끼셨기에, 그 연장선에서 나머지 '쓰라림'으로 느껴지던 부분들을 보완하고 치유하는 '완성과 숙성의 공부'를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자비와 사랑과 치유의 복음'이 그분의 삶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 나올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바울은 동일한 구약성서의 율법들에서 '굴레와 버거움'의 심상을 더 많이 느낀 인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의 서신들에 들어 있는 그의 '율법관'은 시종 부정적이고 적대적이지요. 그렇게 율법을 격하시키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예수님처럼 그분 복음의 위대성을 증언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이것이 예수님과 바울의 '사생애 연단 과정'의 차이점이기도 할 것입니다.
[홍정기 작가 약력]
캠퍼스중앙사무국 교육국장 섭리신학 교수 아가페전도단 교육국장 현) 섭리신학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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