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숨결속으로]
므리바 샘가의 모세
민수기 20:12에서 전능하신 분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믿고 나를 거룩하게 하지 않았으니,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들이지 못하리라.” 여기서 모세는 ‘전능하신 분을 거룩하게 하지 않아서’ 책망을 받고, 그로 인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구약성서에서 모세의 노정은 처음 이집트에서부터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와디 무사의 므리바 샘 / 이미지, Daum)
모세는 오랜 세월을 지나 노년기에 이르러서야 요단강에 도착했습니다. 이집트 왕궁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그리고 시나이 광야에서 또 40년, 그 거친 세월을 인내하며 뚫고 올라야 했던 모세의 영도 마음도 지치고 거칠어졌을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영이 전능하신 분 앞에서 아래로 밀려 내려간 심정의 버거움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32:19는 “모셰가 진영에 가까이 왔을 때, 그는 (금) 수송아지와 (사람들의) 춤을 보았다. 그러자 모셰는 분노하여 노여워하며, 그 판들을 자기 손에서 산 밑으로 던져, 부수어 버렸다” 하였는데, 이는 ‘이 모든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하는 모세의 분노와 좌절의 심상을 잘 드러내 주는 일화입니다. 아니, 그 돌 판은 굳이 부술 필요가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전능하신 분께서 친히 글을 써 주신 것이라고 기록될 정도로 신성한 것이니 말이지요.
결국 전능하신 분께서는 출애굽기 34:1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너를 위하여 돌 판 두 개를 처음 것들처럼 깎아라. 그러면 네가 부수어 버린 그 처음 판들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들에 (다시) 기록해 주리라” 하셨는데, 여기에 ‘백성들의 잘못’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네가 부수어 버린 그 처음 판들’이라는 준엄한 지적이 명시되어 있을 뿐이지요. 모세가 그 돌 판을 부수었기 때문에, 전능하신 분께서 다시 만들어 주셔야 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훗날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역시 사도행전 5장에서 단 한 번 전능하신 분을 속였다고 해서, 단지 그것 때문에 그들의 생명을 거두시는 조급하신 분은 아니십니다. 그들의 평소의 삶이 그러한 심판의 근거가 된 것이겠지요. 죄악이 관영해야 비로소 심판을 행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시나이 광야 40년 세월의 풍상에 에인 모세의 거칠어진 심경이 또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모세에게 “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하는 말씀이 떨어진 셈이지요. 그러지 않았다면, 모세는 살아서 여호수아와 더불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3년을 ‘역사의 가나안’의 삶을 사시다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육신이 없으셨기에, 영으로 바울과 함께 동행하셨지요. 그리고 바울이 다 구현해 내지 못한, 예수님 당신의 삶의 경지를 이 땅 위에 다시 펼쳐 보이시기 위하여 재림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육신이 살아 있었기에, 여호수아와 더불어 살아서 가나안에 들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호수아는 모세의 가르침을 더욱 체계화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리 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느덧 자기 안에 ‘영적인 한계’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사사기의 삼손의 경우도 단순히 ‘머리카락을 자른 것’ 그 자체보다, 그 지경에 이를 정도로 망가진, 전능하신 분 앞에서의 그의 심정적 추락을 더 크게 보아야 합니다. 성서의 대언자 정도 되는 인물들은 저마다 전능하신 분과의 긴밀한 사랑의 사연을 간직했습니다. 그래서 훗날 머리카락과 더불어 다시 자라난, 삼손의 전능하신 분에 대한 심정과 사랑이 그의 최후의 순교를 가능하게 한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므리바 샘물가에서의 일’과 삼손의 ‘머리카락이 잘린 사건’은 그 두 사람의 영원한 역사적 상처로 기억될 것입니다.
[홍정기 작가 약력]
캠퍼스중앙사무국 교육국장 섭리신학 교수 아가페전도단 교육국장 현) 섭리신학 연구원 <저작권자 ⓒ 제이에스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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